메레 오펜하임(1913–1985)은 의심할 여지 없이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예술가 중 한 명입니다. 오펜하임은 회화, 드로잉, 조각 뿐 아니라 디자인과 패션 오브제를 제작했으며, 시를 짓고, 무대 세트와 주얼리를 디자인하고, 사진가이자 모델로도 활동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에게 (프랑스) 초현실주의의 대표적 인물로 여겨지는 오펜하임은 특정한 양식으로 분류될 수도, 어떤 정해진 예술적 발전의 틀로도 설명될 수 없습니다. 오펜하임은 일체의 주류적 의견, 장르의 구분, 예술 창작에 대한 고정관념에 저항했습니다. 오펜하임은 실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나 호기심으로 가득했고, 미지의 것, 새로운 것이 주는 기쁨에 열려있었습니다. 그래서 오펜하임은 연작을 만들 수 없는 작가였습니다. 반복되는 공식을 사용한다거나, 스스로를 한계에 가둔다거나, 같은 것을 거듭해서 되풀이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한편 젠더 이슈, 그리고 이에 수반되는 사회적, 예술적 담론에 대한 참여는 오펜하임에게 …
메레 오펜하임(1913–1985)은 의심할 여지 없이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예술가 중 한 명입니다. 오펜하임은 회화, 드로잉, 조각 뿐 아니라 디자인과 패션 오브제를 제작했으며, 시를 짓고, 무대 세트와 주얼리를 디자인하고, 사진가이자 모델로도 활동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에게 (프랑스) 초현실주의의 대표적 인물로 여겨지는 오펜하임은 특정한 양식으로 분류될 수도, 어떤 정해진 예술적 발전의 틀로도 설명될 수 없습니다. 오펜하임은 일체의 주류적 의견, 장르의 구분, 예술 창작에 대한 고정관념에 저항했습니다.
오펜하임은 실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나 호기심으로 가득했고, 미지의 것, 새로운 것이 주는 기쁨에 열려있었습니다. 그래서 오펜하임은 연작을 만들 수 없는 작가였습니다. 반복되는 공식을 사용한다거나, 스스로를 한계에 가둔다거나, 같은 것을 거듭해서 되풀이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한편 젠더 이슈, 그리고 이에 수반되는 사회적, 예술적 담론에 대한 참여는 오펜하임에게 중요한 활동이었습니다. 남성이 지배하는 영역에서 여성으로 활동했던 오펜하임에게 자신의 젠더는 창작의 모티프일 뿐 아니라 개인적인 정치활동의 한 축이었습니다. 오펜하임의 비판적이고, 해방적이며, 비순응적인 태도는 당시에나 지금이나 많은 예술가에게 귀감이 되었고 또 공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1932년 파리로 이주한 오펜하임은 현지의 미술신에 빠르게 적응했고 알베르토 자코메티, 파블로 피카소, 장 아르프, 앙드레 브르통, 막스 에른스트와 함께 주기적으로 전시에 참여했습니다. 만 레이의 유명한 누드 사진 시리즈 Erotique-voilée가 제작된 것이 이때입니다. 검은 인쇄용 잉크만으로 몸을 가린 채 중장비 뒤에 서 있는 20세의 오펜하임이 보이는 작품입니다.
오펜하임의 초기 작업은 낙서 같은 드로잉, 수수께끼 같은 회화, 기묘한 오브제, 콜라주, 주얼리 및 패션 액세서리 디자인이 주를 이뤘습니다. 가장 잘 알려진 초현실주의 작품 ‘모피로 된 아침식사(Le Déjeuner en fourrure)’가 만들어진 것은 1936년이었습니다. 털로 덮인 잔과 잔받침, 작은 숟가락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까예 다르 갤러리(Galerie Cahiers d’Art)에서 처음 선보인 후 MoMA의 획기적인 전시 <환상예술, 다다, 초현실주의(Fantastic Art, Dada, Surrealism)>(1936-1937)에 포함되었고, 앨프리드 바(Alfred Barr) 관장에 의해 미술관에 소장되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오펜하임은 곧이어 창의력과 정체성에 대한 깊은 고민의 시기를 맞게 됩니다. 자신이 뮤즈 정도로 여겨진다거나, 자신의 작업이 오브제 트루베(objet trouvé) 기법으로 환원되는 것은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오펜하임은 스위스 베른에 작업실을 마련하며 새로운 예술적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드로잉, 회화, 스케치를 비롯해, 디자인, 패션, 주얼리에서부터 가구와 직물까지, 오펜하임은 장르를 넘나들며 재료를 결합했고, 환상적이고 공상적이며, 시적이고 아이러니하며, 유머러스하면서도 진지한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창작은 언제나 일종의 게임과도 같아서, 색채와 형태, 다양한 소재, 감각과 소외를 조합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펜하임의 작품은 때로는 기하학적 명료함이, 때로는 서정적 추상성이 역력합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오펜하임은 일련의 개인전과 단체전을 통해 국제 무대에서 재조명받기 시작했습니다. 1967년 스톡홀름 현대미술관(Moderna Museet)은 오펜하임의 첫 회고전을 개최했습니다. 젠더 역할에 대한 오펜하임의 물음이 파리 시절에는 여전히 가부장적으로 정의된 여성성의 관점에서 이해되었다면, 이제는 포괄적인 양성성 이론으로 올라서며 ‘여성적’ 예술과 분명한 대비를 이루었습니다. “영적 영역에서 남성과 여성은 꼭 같다. 차이는 동물적인 부분에서 존재할 뿐이다. 영혼은 양성이다.” 바로 이러한 태도가 오펜하임을 후속 세대 예술가에게 영감과 방향성을 제시하는 등대 같은 존재로 만든 것입니다.